이데아 기반의 사고와 현상 기반의 사고

2023. 1. 22. 06:59Philosophy & Thinking

Antifragile and non-linearity

that logic excludes _by definition_ nuances, and since truth resides exclusively in the nuances, it is "a useless instrument for finding Truth in the moral and political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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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원인과 본질이 있으며, 이를 "이데아"라고 정의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으로부터 시작된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 불변의 진리를 찾고, 이를 통해 항상 참인 명제들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당연히 모든 서양 철학이 이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데카르트 때까지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면 서양 철학의 역사는 곧 논리학의 역사이다. 감각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본질로부터 이끌어내는 결과는 또한 추상적이며,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현상적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이다. 추상적인 어떤 대상을 증명하기 위해 감각할 수 있는 현상적인 것을 근거로 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선하다"라는 추상적 명제의 근거로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선하기 때문이다"를 들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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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주장했던 데카르트도, 결국에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공리(진리)로부터 다른 진리를 유도해 내기 위해 논리적 접근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신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감각 정보나, 현상들로부터 단서를 얻을 수 없고, 오로지 공리로 정의한 명제(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와 그로부터 설계된 논리적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취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항상 참인 "진리"를 향해 가기 위한 좋은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의 접근 방식을 그대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을 비즈니스라고 하자.) 가져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는 아래 2가지 이유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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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이러한 접근 방식은 보상에 관해 비선형성을 띤다.(보상에 대한 비선형성의 시각적 모형은 위의 그래프를 보라.) 항상 참이라고 간주되는 명제인 공리로부터 논리학을 이용해 전개된 수많은 추상적 결과물들은, 공리 자체가 의심받는 경우 비선형적인 손실을 암시한다. 공리가 참인 경우에 추가적으로 명제를 얻어내는 것에 따른 보상보다, 공리가 거짓인 경우에 공리로부터 출발한 모든 명제의 세계를 갈아엎어야 하는 손실이 비선형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는 실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고, 이를 위해 어떤 전제를 세운다. 하지만 이 전제를 항상 참이어야 하는 명제, 즉 공리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며, 최악의 경우 많은 비용을 투자한 이후에 공리라고 믿어왔던 해당 명제가 거짓임이 드러나게 되면 비선형적인 손실을 입게 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어떤 가설을 공리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 위해서는 하방 압력보다 상승 압력이 더 큰 여러 번의 실험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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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복잡계"에서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논리적 추론은 복잡도가 높아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복잡계(Complex System)란, 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사이의 뚜렷한 상호의존성을 보이며, 어떤 결과값을 만들어내는 원인 변수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복잡계에서는 어떤 원인이 항상 명확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원인 자체를 포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실제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문제를 해결하고 비즈니스 가치를 도출하는 것")를 얻어내기 위해 어떤 명제를 원인으로 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인이 되는 명제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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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접근방식이 공리인 것처럼 보이는 명제에 전적으로 근거해서는 안되며, 이 명제를 통해 논리적으로 추론한 다른 명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전적으로 근거한다는 의미는 위 명제들을 항상 참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많은 비용을 투자한다는 이야기인데, 각 명제가 참일 때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거짓일 때 얻을 수 있는 손실이 더 크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명제들을 공리가 아닌 검증 대상으로 두고, 하방 압력보다 상승 압력이 더 큰 작은 단위의 실험들로 구성하여 검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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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명제를 "참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해야 하는 단위"로 보고 작은 단위의 실험을 진행하게 되면 그 결과는 예상되는 것보다 더 클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험이 "섣부른 개념화"가 일어나지 않을 만큼의 작은 단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논리학은 개념을 정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미묘한 차이를 제거해버린다. 진리는 미묘한 차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논리학은 윤리학이나 정치학에서 진리를 찾을 때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도구이다." 작은 실험을 통해서 명제를 검증하기 위한 단서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단서를 얻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미묘한 차이의 파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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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중학교 2학년 학부모 1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자녀에게 이러이러한 교육을 제공하면 가치를 느낄 것이다"라는 가설을 검증한다고 하자. 이 가설에 대한 결과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목할만한 것은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 아이는 형이 있어서 형이 하는 대로 그냥 시킨다", "태블릿보다는 종이에 푸는 게 아직은 더 익숙하다", "이미 학원을 여러 개를 보내고 있다", "아직 학원에 보낼 형편이 안되어 집에서 예복습만 한다"와 같은 가설 자체와는 무관해 보이는 차이들이다. 어쩌면 가설 자체보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진리에 다가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명제를 검증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물론 각각의 실험이 소규모 집단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러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의 하방 압력은 그리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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